일본의 아메카지룩,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2023. 8. 3. 22:43카테고리 없음

 

하라주쿠에서 모든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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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 후지와라 히로시는 미에에서 가장 멋진 소년이었다. 핸드메이드 덱으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를 듣고, 로커빌리 밴드에서 연주했다. 그눈 일본 관서 지방에서 가장 멋진 아이였을 것이다. 열여덟 살에 도쿄로 이사한 뒤 '런던 나이트'라는 언더그라운드 파티에서 베스트 드레서로 뽑혀 런던으로 무료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그의 영웅인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그의 파트너 맬컴 맥라렌을 만나고, 1년 뒤 런던으로 돌아가 그들의 매장 월드 엔드(World's End)에서 일한다.

 

맥라렌은 후지와라에게 이제 펑크와 뉴웨이브를 잊고, 뉴욕에 새롭게 등장하는 음악인 힙합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그는 일본에 최초로 들어가는 힙합 음반을 잔뜩 들고 도쿄로 돌아왔다. 1985년 다카기 간과 힙합 유닛 타이니 펑크(Tinnie Punx 또는 Tiny Panx)를 결성한다.

 

유행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 런던과 뉴욕에 커넥션이 있던 후지와라는 매달 잡지에 최신 글로벌 트렌드를 소개했다. 1987년 후지와라와 간은 라스트 오기(Last Orgy)라는 칼럼을 시작했다. 여기서는 스케이트보드, 펑크 룩, 아트 영화, 하이패션, 힙합 등 모든 걸 하나의 세계관으로 혼합해 다뤘는데, 이는 나중에 정식으로 '스트리트 컬처'라는 용어로 정의된다.

 

매달 후지와라와 다카기는 그들이 좋아하는 신인 래퍼, 12인치 싱글 레코드, 옷, 영화, DJ 장비 등을 소개했다. 후지와라는 문화 비평가, DJ, 래퍼, 브레이크 댄서, 그리고 모델로 20대 초반에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전국적으로 라스트 오기의 모든 단어를 절대적 진리로 생각하고 고집하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지와라 이전의 문화적 아이콘들은 자신만의 창작물을 만드는 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후지와라와 그의 문하생들은 잡지를 위한 최고의 음악, 패션, 책, 제품을 큐레이팅하는 '편집'활동으로 성공했다. 일본의 미디어는 미국 동부의 대학 캠퍼스와 파리의 런웨이에서 어떻게 트렌드를 찾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1980년대 중반의 편집자들은 스트리트 컬처의 성장을 따라가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아는 게 많고, 연결점도 많은 후지와라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었다. 하지만 후지와라가 문화에 지속적인 흔적을 남겨놓으려면 문화 정보 센터 이상이 돼야 했다. 그와 크루들은 자신만의 것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후지와라는 국제적인 스투시 트라이브(Stussy Tribe)의 첫 일본인 멤버였다. 후지와라는 1986년 잡지 다카라 지마에서 스투시를 인터뷰한 뒤 그와 친구가 됐고, 그 이후부터 우편으로 스투시 옷상자를 받기 시작한다. 후지와라의 신봉자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나카무라 '스케이딩(Sk8 thing)' 신이치로는 스투시와 비슷한 오리지널 티셔츠 라인을 시작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여러 지원에 힘입어 후지와라, 스케이딩, 이와이는 일본 최초의 진정한 스트리트웨어 브랜드 굿이너프(Goodenough)를 론칭했다.

 

스투시의 방식을 모방한 굿이너프는 하이 퀄리티 티셔츠와 대담한 그래픽 프린트의 스포츠웨어에 초점을 맞췄다. 「뽀빠이」와 「핫도그프레스」가 1991년 스케이트보드 패션 트렌드의 일부로 다룬 뒤 브랜드는 일본에서 곧바로 성공한다. 후지와라는 매달 잡지에 굿이너프의 옷을 입고 등장했지만, 브랜드에서의 그의 역할을 숨겼다. 브랜드의 기원이 감춰져 있었기 때문에 굿이너프는 스투시나 프레시자이브(Freshjive), FUCT 같은 미국 수입품처럼 보였다. 그 덕에 많은 젊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진짜' 굿이너프 매장을 찾아다니다가 길을 잃곤 했다.

 

후지와라는 굿이너프의 성공을 이용해 니고와 조니오에게 다음 의류 벤처를 시작하라고 말한다. 20대였던 둘은 오카지와 함께 하라주쿠의 조용하고 비상업적이었던 곳에 매장을 연다. 오모테산도 쪽이지만 중심가인 메이지 길이나 다케시타 길에서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이들은 이 지역을 '우라 하라주쿠(하라주쿠 뒤쪽)'로 불렀다. 하라주쿠 인근은 여전히 로큰롤과 DC 붐의 붕괴에 따라 휘청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니고와 타카하시는 경제적으로 비탄에 빠진 지역으로 10대를 유혹해 되돌릴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게 됐다. 

 

1993년 4월 이들은 노웨어(Nowhere)를 여는데, 좁고 어둑어둑한 매장을 둘로 나눴다. 한쪽에서는 다카하시가 자신의 펑크 브랜드 언더커버(Undercover)를, 다른 한쪽에서는 니고가 여러 수입 스트리트웨어를 팔았다. 잡지에서 '네오 펑크' 트렌드의 일부로 다뤄지고 난 뒤 언더커버 쪽에서는 곧바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매장의 나머지 반은 여전히 한산했다. 니고는 곧 자신의 성공이 오리지널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데 달렸다는 걸 깨닫는다. 

 

스케이딩은 브랜드 아이디어에 관해 계속 생각했는데 흑성탈출 TV 시리즈를 본 뒤 독자적인 콘셉트를 만들어냈다. 그는 영화의 상징이라 할 만한 유인원 얼굴을 로고로 삼고, 'A Bathing Ape in Lukewater(미지근한 물에서 목욕하는 유인원)'이라는 슬로건을 붙였다. 니고는 이를 줄여 첫 세 단어(A Bathing Ape)를 공식 브랜드명으로 썼고, 미국의 빈티지 옷 스타일로 티셔츠 몇 장과 재킷에 찍었다.

 


 

 

후지와라 히로시의 이야기는 - 2 - 으로 계속 이어나갈 예정!

 

 

 

 

 

 

*출처 : 아메토라

일본은 어떻게 아메리칸 스타일을 구원했는가